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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탄생 100주년
1996년 10월 8일 늦은 오후, 『토지』 완간(전 16권, 솔출판사)을 기념하는 잔치가 열렸다. 26년(1969~1994)에 걸친 외로운 고투 끝에 이 대작을 완성한 원주시 단구동의 낮은 언덕 위 작가의 자택 앞마당에서였다. 축하객의 대부분은 문단 인사였지만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처럼 작가를 존경하여 먼 길을 찾아온 문단 밖 사람도 적지 않았다. 작가는 오랜 서울살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한 고향 말씨로 인사말을 하였다. “선생님, 고맙습니다”라고 적은 엽서를 보낸 익명의 독자에게 답장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니 슬프다던 말이 특히 생각난다. 잔치 막바지 사회자인 소설가 이문구의 청을 받아 머뭇거리며 앞에 나온 작가는 노랫말도 곡조도 낯선 옛 민요 한 토막을 불렀다. 그 서툰 노래는 모두의 마음을 여는 힘을 지닌 것이었다. 마당 여기저기 신명이 솟아 흥성흥성, 비로소 진짜 잔치 같아졌다.
2008년 타계한 한국 문단의 거목 박경리. 올해는 그의 탄생 100주년이자 대표작 『토지』 완간 32주년을 맞는 해다. [중앙포토]
돌아보면, 그 행사는 한 작가의 특별한 성취를 기념하는 것이면서 또한 한국문학의 성숙을 기뻐하고 축하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모두의 가슴속에 흐뭇한 자부와 같은 느낌이 차올랐던 것은 이 때문이리라.
그리고 30년 세월이 흘렀다. 2008년 봄 세상을 뜬 작가는 ‘그래 그래 금이(今伊) 니가 먼저 갔구나. 어릴 적 곱디곱던 그 마음씨처럼 좋은 날에 갔구나’ 어릴 적 동무들의 따뜻한 마중을 받으며 고향 땅에 묻혔다. 작가의 삶과 문학을 기리는 공간이 여러 곳(원주 2곳, 통영, 하동)에 생겼고 작가의 작품을 바탕으로 만든 드라마·만화·국악·뮤지컬·노래를 비롯해 청소년 독자들을 위해 쉽게 풀어 쓴 『청소년 토지』 등 파생 예술이 줄이었다. 외국어 번역도 활발하게 이루어져 영어·불어·중국어·일어 번역이 나왔다.
무엇보다도, 『토지』 『김약국의 딸들』과 같은 대표작 몇 편은 고전의 반열에 들었다. 이를 따라 곳곳에 독서 동아리가 생겨났고, 작가의 삶과 문학의 발자취를 직접 밟는 독자들의 답사 문화가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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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필사하는 사람도 적지 않은데, 최근에는 『토지』 전편을 옮겨 적은 사람까지 나왔다고 한다. 박경리 문학 수용의 이 같은 양상은 우리 독자들의 새로운 문학 향유 문화를 선도하는 것이라는 。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우리 문학사에서는 드문 장편 작가
원주 옛집 집필실에는 육필 원고와 안경, 만년필이 그대로 남았다. [중앙포토]
소설가로 알려져 있지만 박경리는 좋은 시인이기도 하였다. 첫 발표작인 ‘바다와 하늘’(1955)부터 최근에 발굴된 미발표시를 묶은 유작시집 『산다는 슬픔』(2026, 47편 수록)에 이르기까지 모두 216편의 시가 알려져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박경리 시는 감각을 넘어 정신을 문제 삼는 정신의 시인데 이런 특성은 159행의 장시 ‘바다와 하늘’에서 이미 뚜렷하다. 상업은행 직원들의 글을 모은 『천일(天一)』에 본명인 박금이의 이름으로 발표된 이 작품의 초。은 하늘을 지배하는 용신의 부당한 폭력에 맞서는 바다의 항거, 맞섬의 정신이다. 그는 용신의 폭력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으니 자신의 전부를 던져 맞선다. 부딪쳐 부서진다 하더라도 나아가며, 멈추지 않는다.
박경리의 시에서 부정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이기와 탐욕에 갇혀 남의 것을 뺏고 남을 해치는 악인들, 생태계 파괴의 현실, 일본 제국주의, 확신에 갇힌 정신, 권력 지향의 지식인 등이다. 이 가운데 권력 지향의 지식인에 대한 작가의 비판은 특히 서슬푸르고 집요하다. 그들은 권력에 빌붙어 자유를 포기했으며, ‘지식의 도끼’로 ‘진실을 찍어내는’ 짓을 일삼음으로써 거짓으로 온 세상을 덮는 ‘사기꾼’들이다. 이런 사기꾼 지식인을 비롯한 부정적 타자들의 안쪽을 투시하는 해부는 날카롭고 사유는 깊어 읽는 이의 눈을 열어 새로운 것을 보게 하고 알게 이끈다.
부정적 타자는 물론이고 자기 자신까지도 부정의 대상으로 삼는 그 부정의 정신은 그 부정성으로부터 끊임없이 떠나는 정신을 낳는다. 박경리 시를 일관하는 자유의 지향성은 이 떠나는 정신의 소산이다. 박경리 시의 화자는 ‘시시각각/ 자신과도 이별’(‘매(鷹)’ 중에서)하며 떠나고 또 떠나는 길 위의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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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떠남은 타자들과 자신의 부정적 측면에 대한 부정이고 단절이기에 싸워야 하며 잃어야 하고 견뎌야 하는 것, 발자국마다 피가 묻어 있다.
박경리 시의 화자는 자신을 일컬어 ‘역신(逆臣)’이라 하였다. 그는 거짓을 거부하고 스스로 소외를 선택하여 “끝이 없는 유배”의 길을 오연히 걷는 강한 주체이다. 정주와 안정, 굴종과 타협을 거부하고 맞서 싸우며 계속하여 떠나는 이 강한 주체가 걷는 정신의 길은 높고 당당하여 한국문학사의 한 장관이라 할 만하다. 지금도 그러하고 앞으로도 그러할 장엄한 아름다움이 눈부시다.
박경리는 우리 문학사에서는 드문 장편 작가였다. 『표류도』(1959), 『김약국의 딸들』(1962), 『시장과 전장』(1964), 『파시』(1965), 『토지』(1994)로 이어지는 봉우리들이 솟아 그 중심 배경 가운데 하나인 지리산과도 같이 깊고 높고 큰 ‘박경리 문학’을 이루었다.
1970~80년대 대하소설의 시대를 선구한 『토지』는 구한말에서 광복에 이르기까지의 역사 전개를 다양한 사람들의 구체적 삶을 통해 총체적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등장인물들의 발길은 나라 밖으로까지 뻗어 일본·중국·만주·연해주까지 미치니 동북아시아 광대한 공간이 소설의 무대이다. 전근대 사회가 무너지며 근대적 사회로 이행하는 역사 전환기이며 일제 강。의 치욕과 고통의 시기였던 당대의 현실을 이 작품만큼 넓고 깊게 그려 낸 소설은 그전에도 그 뒤에도 없었다.
『토지』의 등장으로 우리는 소설로 된 한국 근현대사를 갖게 되었고, 『토지』 읽기를 통해 지난 역사를 구체적으로 살아 보는 특별한 체험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작품에는 독서를 방해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할 만큼 자주, 전지적 서술자와 작중 인물들이 참여하는 치열한 토론이 나온다. 책을 읽으며 독자는 그 자리에 나아가 그들과 토론하며 인식 지평을 넓히고 삶의 태도를 가다듬을 수 있다. 이 。에서 『토지』는 독자 각자가 주체가 되어 지식을 넓히고 깨우침을 얻고 자기 조정하며 나아가는 주체적인 교육의 마당이다.
‘가는 사람 오는 사람/ 길 막고 서서/ 앞, 앞이 말 못한다, 하며/ 가슴 치고 울던 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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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의 짧은 시 ‘미친 사내’의 한 부분이다. 박경리 문학은 이 시의 주인공인 또개와 같은 사람들을 대신하여 그들의 억울하고 원통한 사연을 말함으로써 그의 한을 다스리는 ‘대언(代言)’이다. 또개는 또한 우리 독자들이기도 하니, 『토지』가 대표하는 박경리 문학은 우리 읽는 이의 대언이기도 하다. 우리는 박경리 문학을 읽으며 저마다 하고 싶으나 하지 못한 자신의 마음속 말을 읽고 듣는다. 그 말은 눈을 열어 자신을 바로 보게 하고 높은 곳으로 들어 올린다.
인물·서술자 치열한 토론, 독자도 그 속으로
박경리 문학에는 물론 인간 삶의 애(哀)와 환(歡)이 두루 나오지만 작가의 관심은 애(哀)에 보다 기울어져 있다. 애(哀)는 고(苦)와 함께하는 법, 그 세계는 어둡고 무겁다. 『토지』의 세계도 당연히 그렇다. 600명이 넘는 『토지』의 등장인물은 하나 예외 없이, 생명 지닌 존재라면 피할 수 없는, 삶의 과정에서 상처 입어 생겨난 한을 품고 그것에 시달리며, 그 한을 풀고자 몸부림치며 살아간다. 『토지』의 맨 아래에 놓인 것은 ‘한-해한(解恨)’의 형식이다.
그러나, 완전한 해한이란 관념의 실현은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이상일 뿐이다. 당연히 그들이 걷는 ‘해한’의 길은 끝이 없다. 구불구불 미로와도 같은 그 길을 『토지』의 600여 등장인물은 모두가 줄기차게 걷는다. 이 。에서 그들은 동질적이니 이른바 주인공은 없다. 그들 모두가 주인공이다.
『토지』는 이기의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 거듭거듭 떠날 때, 창조적·이타적 노동을 통해 자기 갱신을 이룰 때 그 길은 아름답게 빛난다고 말한다. 이처럼 떠남에서 비롯하는 생명의 능동에 대한 적극적 긍정이 그 전개를 이끌어 어둡고 무거운 『토지』의 세계는 마지막에 이르러 환한 빛살과 충만의 세계로 전화한다.
박경리 문학은 인간 삶의 근본을 문제 삼기에 특정한 시공간에 갇히지 않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언제나 ‘새로운 문학’으로 다시 살아 읽히고 또 읽힐 미래의 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정호웅 문학평론가. 전 홍익대 교수. ‘토지와 만주 공간’을 비롯하여 박경리 문학을 다룬 글을 10여 편 썼다. 『토지 사전』을 감수하였고, 『한국의 역사소설』 『대결의 문학사』 『한국소설사』(공저) 등의 저서를 냈다.
몸부림치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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